아름다운사회

기억, 제다

기억, 제다

by 강판권 교수 2016.05.16

“추위를 넘어야 향기를 만들 수 있어. 그러나 향기는 단순히 추위를 견딘다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황금의 손, 미다스처럼 누군가의 손이 반드시 필요하거든.”
나는 아주 오랜만에 꿈을 꿨다. 1년에 한 번 꿈을 꿀까 말까 할 만큼 나는 꿈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왠지 어젯밤에는 꿈을 꿨으니, 분명 전날 이주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우전 녹차였다. 나는 평소에 차를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주위 사람들은 내가 무척 차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혹 내가 커피를 마시면, “교수님도 커피 드세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차를 좋아한다는 얘길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왜 사람들은 내가 차를 좋아한다고 생각할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내가 하는 일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역사를 전공하고 나무를 좋아하니 으레 전통차를 좋아할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원래’라는 말은 ‘편견’의 다른 말이다. 처음부터 존재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차를 좋아할 것이라는 편견처럼, 나도 녹차가 별로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녹차에 대한 나의 편견은 올해 경남 하동 쌍계사의 우전 녹차를 마신 뒤로 완전히 사라졌다. 우전 녹차는 곡우 전에 만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차다. 그런데 우전 녹차라고 해서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같은 찻잎이라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맛이 전혀 다르고, 어떤 사람과 마시느냐에 따라 느낌이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녹차에 대한 나의 새로운 기억은 쌍계에서 우전 녹차를 만든 ‘신의 손’ 덕분이다. 우전 녹차는 찻잎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부드러운 것을 사용하지만, 차를 만드는 사람의 손은 세상에서 가장 거칠다. 어린 찻잎이 품고 있는 귀한 향기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삭풍보다 매섭고, 용암보다 뜨거운 고통의 시간을 손으로 녹여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차는 차나무의 삶과 차를 만드는 사람의 사랑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룰 때 탄생한다. 차나뭇과의 차나무는 나무 중에서도 예민하고 까다로운 존재다. 그래서 차나무는 아무데서나 살지 않는다. 하동은 우리나라에서 차나무가 아주 살기 좋은 곳이다. 신라의 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차씨를 이곳에 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차나무가 이곳에 살고 있는 까닭이다.
재를 넘고 강을 따라 굽이굽이 정성을 달이고 달여야 도착하는 그곳이 하동이다. 처음 우려낸 한 잔의 우전 녹차를 입 가득 머금으면 새벽녘에 일어나 잠긴 눈으로 더듬더듬 옷고름을 매만지고 문을 나선 차인의 눈물겨운 하루가 목구멍에 걸린다. 천천히 찻물을 삼키면 비바람 뚫고 귀가하는 사람의 애절한 눈빛이 스며든다. 두 번째 우려낸 우전 녹차의 찻잔에 눈을 맞추면 덖은 찻잎을 비비는 과정에서 스며든 녹색의 손가락이 눈썹에 걸린다. 찻잔에 손가락에 묻은 푸른 무늬 하나 떨어지면 게을렀던 나의 하루가 물결에 잠긴다.
지금 하동의 찻잎은 어느새 햇살과 섬진강의 물소리에 더욱 짙어져 간다. 차를 만드는 사람들은 올해도 찻잎으로 어김없이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의 허약한 마음에 기운을 불어넣을 것이다. 문다헌 뒤편에 살고 있는 한 그루 차나무의 잎새에 이슬방울 맺히는 시간에 그리운 사람 기다리고 싶은 늦은 봄날이 달그림자에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