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세상에 눈을 뜨고 싶습니다
다시 세상에 눈을 뜨고 싶습니다
by 한희철 목사 2016.03.30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릴 적 보냈던 시간들은 세상에 눈을 뜨는 시간이었습니다. 길고 혹독한 겨울을 견뎌 마침내 찾아온 봄 앞에 더는 눈이 부셔 참을 수가 없다는 듯 가는 눈을 뜨는 연초록빛 이파리들처럼, 이파리로는 떨림을 감당할 수가 없어 잎을 물린 채 꽃으로만 먼저 피어나는 봄꽃들처럼, 눈앞 눈부시게 펼쳐진 세상에 눈을 뜨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작가가 말했다는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1년 동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라는 말을 웃음으로 공감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처음 보았을 때,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을 처음 맞았을 때, 하늘을 나는 새를 처음 보았을 때, 아무 망설임도 없이 다가와 꼬리를 흔들어주는 개와 고양이를 처음 보았을 때, 어미 닭을 쫓아다니는 노란 병아리를 처음 보았을 때, 눈물에 젖은 뺨을 스쳐 가는 바람을 처음 느꼈을 때,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처음 보고 화들짝 놀랐을 때, 처음으로 시냇물에 손을 담갔을 때, 그 마음 설레고 가슴 벅찼을 시간을 우리는 왜 다 잊고 만 것일까요?
그렇게 세상에 눈을 뜨는 과정 중의 하나는 맛이었습니다. 혀끝으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맛 말이지요. 무엇을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무엇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인지, 우리는 참 조심스럽게 배워갔습니다. 하긴 제 어릴 적 시간은 늘 배가 고픈 시절이기도 했고요.
지나가는 개미를 붙잡아 소위 ‘개미 똥구멍’에 입을 대면 자극적인 신맛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혀끝이 짜릿해지는 신맛이었습니다. 철을 따라 피어나는 꽃을 따서 입에 대면 단맛을 즐길 수도 있었고요. 느낄 수 있을까 말까 싶은 희미한 맛을 즐겼던 것이었지요.
풀뿌리를 뽑아 그 뿌리를 씹음으로 싱거운 단맛을 즐기기도 했고, 여름철이 되면 옥수숫대는 우리의 입에서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두껍고 매끈한 겉껍질을 벗긴 뒤 씹는 옥수숫대에선 제법 단맛이 배어 나와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 되어주었습니다.
어딘가 몰래 숨어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처음의 쓴맛을 조금만 참으면 이내 본래의 단맛을 한껏 전해준 칡은 배고프고 헛헛한 우리들에게는 참 고마운 식물이었습니다. 동네 형이 전해준 참새의 고기 맛을 한 점 맛본 뒤론 날아다니는 참새가 맛있는 고기로 보였던 시절이니, 맛에 대한 갈증은 더 유별났다 할 수 있지요.
물놀이를 하다 저수지에 빠져 죽은 친구 소식을 먼 길을 달려 알려주던 날, 수고했다며 동네 어른이 전해준 동전으로 왕사탕을 사서 친구와 함께 창고 벽에 기대어 서서 사탕을 먹던 기억도 남아 있습니다. 입안의 사탕은 녹는 것이 아까울 만큼 달았지만 뭔가 마음은 쓰라리고 허전하고 두려웠던, 그런 순간이 말이지요.
겨울을 이긴 봄은 소홀히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듯 떨며 눈을 뜹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기나긴 겨울 같은 고난을 잘 이겨낸다면 우리 앞의 세상도 그렇게 눈부시게 열리겠지요. ‘다 자란 자가 다시 보는 하늘’처럼 다시 세상에 눈을 뜨고 싶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처음 보았을 때,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을 처음 맞았을 때, 하늘을 나는 새를 처음 보았을 때, 아무 망설임도 없이 다가와 꼬리를 흔들어주는 개와 고양이를 처음 보았을 때, 어미 닭을 쫓아다니는 노란 병아리를 처음 보았을 때, 눈물에 젖은 뺨을 스쳐 가는 바람을 처음 느꼈을 때,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처음 보고 화들짝 놀랐을 때, 처음으로 시냇물에 손을 담갔을 때, 그 마음 설레고 가슴 벅찼을 시간을 우리는 왜 다 잊고 만 것일까요?
그렇게 세상에 눈을 뜨는 과정 중의 하나는 맛이었습니다. 혀끝으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맛 말이지요. 무엇을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무엇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인지, 우리는 참 조심스럽게 배워갔습니다. 하긴 제 어릴 적 시간은 늘 배가 고픈 시절이기도 했고요.
지나가는 개미를 붙잡아 소위 ‘개미 똥구멍’에 입을 대면 자극적인 신맛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혀끝이 짜릿해지는 신맛이었습니다. 철을 따라 피어나는 꽃을 따서 입에 대면 단맛을 즐길 수도 있었고요. 느낄 수 있을까 말까 싶은 희미한 맛을 즐겼던 것이었지요.
풀뿌리를 뽑아 그 뿌리를 씹음으로 싱거운 단맛을 즐기기도 했고, 여름철이 되면 옥수숫대는 우리의 입에서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두껍고 매끈한 겉껍질을 벗긴 뒤 씹는 옥수숫대에선 제법 단맛이 배어 나와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 되어주었습니다.
어딘가 몰래 숨어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처음의 쓴맛을 조금만 참으면 이내 본래의 단맛을 한껏 전해준 칡은 배고프고 헛헛한 우리들에게는 참 고마운 식물이었습니다. 동네 형이 전해준 참새의 고기 맛을 한 점 맛본 뒤론 날아다니는 참새가 맛있는 고기로 보였던 시절이니, 맛에 대한 갈증은 더 유별났다 할 수 있지요.
물놀이를 하다 저수지에 빠져 죽은 친구 소식을 먼 길을 달려 알려주던 날, 수고했다며 동네 어른이 전해준 동전으로 왕사탕을 사서 친구와 함께 창고 벽에 기대어 서서 사탕을 먹던 기억도 남아 있습니다. 입안의 사탕은 녹는 것이 아까울 만큼 달았지만 뭔가 마음은 쓰라리고 허전하고 두려웠던, 그런 순간이 말이지요.
겨울을 이긴 봄은 소홀히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듯 떨며 눈을 뜹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기나긴 겨울 같은 고난을 잘 이겨낸다면 우리 앞의 세상도 그렇게 눈부시게 열리겠지요. ‘다 자란 자가 다시 보는 하늘’처럼 다시 세상에 눈을 뜨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