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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하게 나이 들기

근사하게 나이 들기

by 이규섭 시인 2019.04.19

은퇴 후 즐겨 보는 TV프로그램은 KBS1TV의 ‘인간극장’과 EBS의 ‘세계테마기행’이다. 인간극장 방영시간이 아침식사 시간과 비슷하고 평범하지 않은 보통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이 가는 다큐다. 세계테마기행은 하루를 마감한 저녁 느긋하고 편하게 공짜 여행을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TV보다 신문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접한다. 드라마를 본지도 까마득하다. 나이 탓인가. 막장으로 가는 가짜 이야기가 심드렁해졌다.
이번 주 인간극장 주인공 칠두 씨(‘칠두 씨의 봄날’)는 신인 모델로 인생 2막을 열었다. 올해 예순다섯. 훤칠한 키에 은빛 머리카락과 텁수룩한 수염이 카리스마 넘친다. 젊은이들과 런웨이 무대에 올라 패션 센스를 뿜어낸다. 수명이 짧은 젊은 모델들의 롤 모델로 떠올랐다.
젊은 시절 패션 잡지를 보며 모델을 꿈꿨지만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작은 슈퍼마켓을 시작으로 안 해본 장사가 없다고 한다. 순댓국집을 차려 대박을 치면서 풍요로운 시절도 보냈다. 확장했던 사업이 잇따라 실패하면서 가게를 정리했고 황혼의 나이에 생계를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예순을 넘긴 그를 써주는 곳은 없었다. 기술도 없는 데다 이력서를 들고 찾아가면 “다음에 연락드리겠다”는 소릴 듣고 씁쓸하게 돌아섰다. 가족 몰래 공사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은퇴 후 손자를 보며 노후를 즐길 아내 향숙 씨(61)가 반찬가게에서 일하며 남편 대신 생계를 꾸려간다. 그런 아내에게 늘 미안하여 일이 없는 날은 ‘달링’을 마중하러 지하철역에 나간다. 칠두 씨에게 꿈의 불씨를 살리며 모델을 권유한 건 연극배우인 딸이다. 모델 학원에 등록했다. 독특한 외모에 성실한 노력 덕에 주목 받는 시니어 신인 모델로 이름을 알린다.
칠두 씨가 다니는 시니어 모델학원에서 카메라가 잡은 인물은 일흔여섯의 모델 지망생 박인숙 씨.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박수근 화백의 딸이다. 박 씨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미술 교사가 됐고, 2006년 중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이후 서양화가로 활동하다 70세가 넘어 모델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서울패션위크 ‘라이프 포뮬라’ 패션쇼에도 올랐다. 모델 일을 배운 후 일상에 활기가 넘친다며 청일점 칠두 씨를 치켜세운다.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손담비의 ‘미쳤어’를 불러 장안의 화제라는 지병수 씨(77)를 유튜브로 봤다. 노인의 막춤이 아니라 아이돌 댄스다. ‘할담비(할아버지+손담비)’ 소리를 들으며 광고 모델로 떴다. 사업에 실패해 지금은 기초생활수급자이고 자식은 없지만 즐겁게 산다는 사연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졌다. 순수한 열정이 대중들에게 어필했다.
멋진 실버 라이프를 추구하는 그레이 크러시가 고령화시대 새 문화풍경으로 떠올랐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나이 든다는 게 얼마나 근사한가. 은퇴를 앞둔 이들은 노후의 할 일을 미리 생각해 두는 것도 방법이다.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꿈이나 그동안 했던 분야에서 고르는 것이 성공 확률이 높다. 노후에는 즐기면서 하는 일에서 보람을 찾아야 그레이 크러시 반열에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