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3·1운동’인가 ‘3·1혁명’인가

‘3·1운동’인가 ‘3·1혁명’인가

by 이규섭 시인 2019.03.02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초등학교 시절 불렀던 ‘삼일절 노래’(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는 따라 부르기 어려웠다. 4분의 4박자 28마디로 긴 데다가 첫 소절 ‘정∼오’ 발음이 어색했다. ‘의요’ ‘생명이요’ 가사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선열하’ 고어체는 생경하다. 이에 비해 ‘유관순 노래’(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는 맑고 경쾌한 동요로 따라 부르기 쉽다. ‘삼월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유관순 누나를 생각 합니다/옥속에 갇혔어도 만세 부르다/푸른하늘 그리며 숨이졌대요’ 여자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면서도 즐겨 불렀다.
3·1절하면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민족대표 33인 보다 유관순이 먼저 떠오르는 건 노래를 통해 역사적 인물의 대중성이 뇌리에 깊이 각인된 탓이다. 1902년에 태어난 유관순은 1919년 3.1운동 당시 열일곱 살의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이었다. 서울서 3·1운동 항일 시위에 참여한 뒤 고향인 충남 천안으로 내려갔다. 4월 1일 병천 아우내장터 시위를 주도하다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수감 후에도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누적된 고문으로 이듬해 순직했다.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1919년 3월 1일 국민들은 일제히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3·1운동은 그해 1월 21일 ‘고종이 독립을 도모하다 독살 당했다’는 소문과 거사 일자를 3월 1일로 잡은 게 기폭제가 됐다. 고종의 국장이 3월 3일로 예정돼 많은 사람들이 상경할 것으로 예상했다.
통신시설이 변변찮은 그 시절 전국 방방곡곡에서 동시다발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진 것은 종교적 영향도 컸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은 모두 종교계 인사로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이다. 일제는 사회단체를 강제로 해산했으나 그나마 유지된 조직이 종교단체다. 3·1운동은 도시에서 농촌, 세계로 확대되어 국내외에서 103만 명이 참가하고 934명이 숨진 최대의 항일운동이다.
지난 1월 당·정·청 정책토론회서 일상용어에 쓰이는 역사적 용어를 바꿔야 한다는 필요성을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3.1운동을 3.1혁명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건국절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한인섭 교수(서울대 법학과)는 “3·1운동은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이지만, “헌법에 명확하게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돼 있어 건국절 주장은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학계의 대체적인 의견은 3·1운동이 독립을 위해 일제에 대항해 일어난 만세운동일 뿐 아니라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정치 체계의 변혁이기 때문에 3·1혁명으로 지칭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이다. 역사적 사건이 한 세기를 맞이한 만큼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수정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다만 3·1혁명으로 이름을 바꿈으로써 ‘촛불혁명’까지 이어지는 대중적 움직임에 명분을 얻으려는 이념적 접근은 경계해야 한다.